정통’ 최루 장치로 메마른 시대 적신다 ‘국화꽃 향기’
경남 통영에서 낚시배로 30분쯤 달리면 용초도라는 작은 섬이 파도를 맞으며 떠 있다. 이 섬엔 전교생 여섯 명을 교사 한 사람이 가르치는 한산초등학교 용호분교가 있다. 해안선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아담한 학교 건물의 교실에선 한려수도의 청청한 물결이 내려다보인다. 겨울바다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이 영화 <국화꽃 향기>의 촬영 현장이다.
김하인씨의 같은 제목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연기자로 출발한 늦깎이 감독 이정욱(40)씨의 데뷔작이다. <국화꽃 향기>는 제목이 암시하듯 최루성 멜로 영화다. 인하(박해일)는 대학시절 만났던 첫사랑 희재(장진영)를 잊지 못한다. 세월은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걷도록 했지만, 7년만에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다. 희재는 그 사이 교통사고로 부모와 약혼자를 잃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혼도 하고 행복한 삶을 설계하지만 이들에겐 또 다른 비극이 닥친다. 불치의 병에 걸린 희재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인하는 노루꼬리만큼 남은 희재의 남은 삶을 함께 보내기 위해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섬을 찾아간다. 그러나 죽어가는 희재의 몸 안에선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줄거리를 듣자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멜로이어서 도대체 어떻게 진부함이나 구태의연함의 늪에 빠지지 않고 영화를 풀어갈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감독은 이 ‘정통’ 멜로가 디지털 시대의 메마른 가슴에 강렬한 인상을 심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요즘 사람들은 참 만나고 헤어지는 걸 가볍게 알죠. 그러나 그럴수록 영원한 사랑, 운명적인 사랑, 아날로그적인 사랑 얘기를 통해 사랑의 참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영화는 충분히 아날로그적이다. 우선 남자 주인공 인하는 에프엠 라디오 피디이고, 여자 주인공 희재는 북 디자이너다. 감독은 ‘라디오’와 ‘책’이라는 매체가 주는 아날로그의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설정했다고 설명한다. 오픈세트를 용초도같은 외진 곳에 마련한 것도 이런 아날로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다. 미술을 맡은 하상호씨 팀은 콘크리트 건물인 용호분교의 연수동을 목조 건물로 겉모습을 바꾸고, 실내의 모습도 손때 묻어 반질반질해진 목조 가구의 느낌을 풍요롭게 살려냈다.
<오버 더 레인보우>로 이미 멜로 영화의 감수성을 소화해낸 바 있는 장진영씨와 <질투는 나의 힘>(내년 4월 개봉)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신진 박해일씨가 감정의 진폭이 심한 두 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장진영씨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관객에게 눈물을 강요하는 억지스런 장치가 없어서” 선뜻 출연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박해일씨는 “이런 남자도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는 남자 주인공이 맘에 들었다”고 말한다. 박해일씨의 경우 최근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촬영이 시작되면서 두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두 작품에서 맡은 배역이 판이하기 때문에 오히려 낫습니다. 아마 배역이 유사했으면 더 힘들었을 겁니다.”
아날로그 감수성을 표방한 이 정통 멜로가 디지털 시대의 관객에게 어떤 공감대를 끌어낼지 두고 볼 일이다. 내년 2월 개봉 예정.
통영/글·사진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한겨레 200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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