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필리핀 수빅
코끝이 맵다. 본격적인 겨울이다. 그럴수록 따뜻한 곳이 그리워진다. 큰맘 먹고 남국으로 떠나볼까. 묵혀놓은 휴가가 있다면 아이들의 방학에 맞춰 가족여행도 생각해 볼만하다.
필리핀의 수빅만. 과거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가 있던 이곳은 오랫동안철조망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동남아 여행지 중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여기에 맑은 자연과 신나는 모험이 있다. 가족 여행지로 제격이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페리호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3시간쯤 달렸다. 커다란 검문소가 앞을 가로막는다. 운전자의 몇 마디에 바리케이드가 올라간다. 잠시 후에 또 검문소가 있다. 역시 몇마디를 주고 받으니 통과다.
미국이 수빅만을 떠난 것은 1992년. 주민들의 반미시위 탓도 있었지만결정적인 이유는 인근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가 항구를 뒤덮어 작전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필리핀 당국은 일반 내국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세계적 리조트를만들기로 하고 이 계획을 현재까지 추진중이다. 반환 후 10년이 됐지만 출입 제한은 여전히 엄격하다.
수빅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외국인 관광객과 리조트의 회원, 업소에서 근무하는 필리핀인 등으로 제한돼 있다. 갇혀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여행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사고가 빈번한 필리핀에서 가장완벽한 치안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더 큰 자유를 준다.
10년간 개발을 했지만 여전히 군사시설의 분위기를 지울 수 없다. 대규모 숙박시설인 리젠더 리조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호텔은 미군 장교들의 관사 등을 개조해 만들었다. 백화점이나 식당 등도 군시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수빅에서 ‘숙소는 그저 숙소’일 뿐이다. 수빅 여행법은 40년이넘도록 전혀 다치지 않은 주변의 자연 속에 파고 들어 휴식과 모험을 즐기는 것이다. 숲과 바다, 심지어 하늘까지 오르내리며 다양한 이벤트를 즐길수 있다.
먼저 숲으로 들어간다. 정글 서바이벌이 기다린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다. 주둔 미군이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 원주민에게배웠다는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관광객에게 그 일부를 보여준다. 대나무만을 이용해 불을 만들고또 대나무 속에서 물을 추출하는 모습에 관광객들은 연신 탄성을 지른다.
숲은 나비들의 정원이기도 하다. 전세계에서 희귀한 나비들이 가장 많은곳이다. 살아있는 수천마리의 나비가 자신만의 색깔을 내뿜으며 하늘에서, 숲에서 색의 잔치를 벌인다. 나비의 군무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이 춤을 춘다.
바닷가로 나간다. 오션 어드벤쳐를 빼놓을 수 없다. 규모는 작지만 밀도있게 꾸며놓은 곳이다. 물개쇼와 돌고래쇼가 펼쳐진다.
쇼가 펼쳐지는 곳이 특이하다. 대부분의 수중동물쇼는 동물을 가두어 놓은풀에서 열린다. 그런데 이 곳의 쇼는 그냥 바다에서 펼쳐진다. 그물만 빙둘러 쳐놓았는데 돌고래가 도망가려면 언제나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이다.
특히 돌고래쇼가 역동적이다. 조련사와 함께 물 속에 들어갔다가 갑자기튀어올라 조련사를 5㎙ 정도까지 하늘로 날려올리는 장면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온다.
수빅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요트 클럽이 있다. 요트 클럽에서 크고 작은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첫 프로그램은 낚시. 요트에는 승객 전원이 이용할 수 있는 낚싯대가 있고미끼도 준비돼 있다. 서툰 초보자라도 물때가 맞고 운이 좋으면 살이 찐참치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1시간 정도의 낚시 후 요트는 얕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스노클링을위해서이다. 아름다운 바다밑을 보려면 안전장구를 하고 요트가 정박한 곳보다 더 얕은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산호 사이로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헤엄친다.
스노클링을 마친 요트는 작은 섬의 해변으로 들어간다. 거의 아무도 없다. 각종 수상스포츠와 함께 멋진 해변 바비큐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바나나보트와 제트 스키를 즐기는 동안 음식상이 차려진다. 물 속에서 첨벙거리며 허기를 느낀 여행객이 그늘속으로 들어와음식을 먹는다.
게, 새우, 도미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 돼지고기 꼬치, 밥, 그리고 인근한국식당에서 가져온 김치까지 있다. 꽤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순식간에모두 없어져 버린다.
노곤해진 몸. 모래밭에 누워 바다를 본다. 호텔들이 있는 옛 군사지역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세상은 수평선을 기준으로 표한 대칭을 이룬다. 에머럴드빛 물빛과 하얀 모래, 코발트 하늘과 뭉게구름. 잡티 하나 없다.
수빅만(필리핀)=글ㆍ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한국일보 200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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